우리는 예쁘기만 한 소녀가 아니다
올여름, 시끄럽고 화려한 컴백들이 줄지어 터져 나오는 가운데, 에스파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자신들의 존재를 드러냈다. 6월 27일 공개된 신곡 ‘Dirty Work’는 제목부터 예사롭지 않다.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청량한 여름 곡의 공식을 비껴간 이 곡은, 거칠고 끈적한 감정선 위에 세워진 무대다. 하지만 진짜 놀라운 건 이 곡의 뮤직비디오였다. 처음 보는 순간 느껴지는 건 단순한 감탄이 아니라, “와, 이건 좀 충격인데?”라는 탄성에 가까운 놀람이었다.
1. 무대가 아니라 현장이었다 — 당진제철소라는 장면의 무게
뮤직비디오의 배경은 실제 ‘현장’이다. 바로 현대제철 당진제철소. 광활한 야적장, 연기와 불꽃이 튀는 구조물, 굉음을 내며 돌아가는 기계들 사이에 에스파 멤버들이 당당하게 선다. 이들은 무대가 아닌 현실의 한복판, 노동과 열기가 가득한 곳에서 춤을 춘다. 대형 중장비 사이로 걷는 멤버들의 뒷모습은 마치 한 편의 전쟁 영화처럼 묘하게 울림이 있다.
그리고 이 공간에서 그들은 단지 아티스트가 아니라, 시대의 목소리를 품은 상징이 된다. 무겁고 더럽고, 결코 쉬운 일이 아닌 삶의 현장에서 그들은 ‘예쁜 아이돌’이 아닌, ‘거친 일을 마다하지 않는 주체적인 존재’로 스스로를 정의하고 있다.
2. 허리로 말한다 — 퍼포먼스의 중심이 바뀌다
이 곡의 안무는 ‘Whiplash’에서 선보였던 목덜미 중심의 섬세한 터치를 넘어, ‘허리’로 중심을 잡는다. 카메라는 집요할 정도로 허리의 움직임을 따라가고, 조명과 의상, 포즈까지 모두 이 축을 기점으로 구성된다.
단순한 섹시 코드가 아니다. 이건 힘의 상징이고 균형의 은유다. 허리를 숙이고, 꺾고, 세우고, 틀어 올리는 그 모든 동작 속엔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삼는 의지가 녹아 있다. 몸을 꾸미는 것이 아니라 움직임으로 말하는 태도. 에스파는 몸의 언어마저도 새롭게 읽어낸다.
3. Shot on iPhone — 디지털 시대의 감각적 실험
놀랍게도 이 뮤직비디오는 아이폰 16 프로로 촬영되었다. 애플의 ‘Shot on iPhone’ 캠페인의 일환으로, 고속 슬로모션과 시네마틱 구도를 적극 활용해 거친 산업적 질감을 세련되게 그려냈다.
특히 차가운 강철과 붉은 조명의 대비, 인물의 표정을 따라가는 긴 롱테이크, 드론 촬영을 활용한 집단 군무 장면은 기술 이상의 감각을 자랑한다.
에스파는 그저 잘 만들어진 아티스트가 아니라, 이제는 디지털 테크놀로지와 예술 사이를 유영하는 하나의 상징적 존재가 되어가고 있다.
4. 가사와 시선 사이, 에스파가 말하는 것
가사도 인상적이다. “I don’t really care if you like me” “I’m not an it girl, more like a hit girl”
그들은 이제 자신이 어떤 존재로 받아들여지든 신경 쓰지 않는다. 중요한 건 스스로가 누구인지, 어떻게 행동하는지다.
그리고 그 메시지를 카메라를 응시하는 눈빛, 등 뒤에서 부서지는 불꽃, 침묵 속에서도 강한 울림을 주는 퍼포먼스를 통해 전달한다. 우리는 그들을 통해 새로운 질문을 받게 된다. “너는 어떤 태도로 이 세계를 살아가고 있어?”
5. 스타일링, 기능성에서 비롯된 미학
이번 뮤비의 의상은 눈에 띄게 실용적이다. 점프슈트, 두꺼운 벨트, 워커 부츠. 기능성을 강조한 이 스타일링은 패션이 아닌 현실적 감각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그 안에서 생겨난 미학이 오히려 에스파를 더 매력적으로 만든다.
화려한 메이크업이나 반짝이는 액세서리가 아니라, 오염되고 거친 배경 안에서 더욱 또렷해지는 얼굴과 몸짓이야말로 이 영상의 미장센이다.
6. 군중, 고독, 그리고 연결
200명이 넘는 엑스트라가 등장한다. 이들은 군무를 함께 추기도 하고, 뒤편에서 묵묵히 걷기도 한다. 하지만 멤버들은 그 군중 속에서도 언제나 조용히 혼자라는 느낌을 준다.
이 고독은 스타로서의 고립감이기도 하고, 주체적인 존재가 겪는 책임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안에서 카메라를 통해 팬들과 연결되면서, 이 고독은 다시 연대로 환원된다.
7. 청량을 거스르다 — 여름의 반대편에서 빛나는 것들
대부분의 아이돌은 여름이면 밝고 시원한 곡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에스파는 그런 계절 공식을 가볍게 비껴간다. 그들은 뜨거운 태양 아래 땀 흘리며 불꽃 속에서 춤추는 존재다.
그래서 더 강렬하고, 그래서 더 잊히지 않는다. 이건 새로운 쾌감이고, 그들만이 내는 소리다.
8. 이 곡은 선언이다 — 가볍지 않은 무게를 품다
‘Dirty Work’는 단지 곡이 아니다. 선언문이자 매니페스토에 가깝다. 에스파는 “우리는 스스로의 선택을 믿고, 그 선택의 결과를 책임질 수 있다”는 태도를 선택했고, 그걸 영상과 음악과 몸으로 증명했다.
쉽지 않은 길이다. 하지만 그래서 더 멋지다. 예쁘기만 한 것이 아니라 강한 존재로서 남겠다는 이 선언은, 지금 이 시대에 꼭 필요한 메시지가 아닐까.
9. 마무리하며 — 오래도록 남는 감정의 잔상
‘Dirty Work’ 뮤직비디오는 쉽게 소비되는 영상이 아니다. 몇 번이고 다시 보게 되고, 볼 때마다 다른 장면이 눈에 들어오며, 서서히 가슴속에 남는 울림이 있다.
그건 단순한 영상미 때문이 아니다. 그 안에 담긴 태도, 이야기, 그리고 감정이 시청자와 진짜 연결을 맺었기 때문이다.
에스파는 점점 더 단단해지고 있다. 그리고 그 단단함은 누군가의 기대를 채우기 위해 만들어진 게 아니라,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만든 방패이자 깃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