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간 감정 중에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 것들이 있다.
몸은 앞으로 나아가도, 마음은 한 자리에 묶인 채 그때를 떠올린다.
안예은의 신곡 ‘지박’은 그런 감정의 형태를 닮았다.
단순히 납량 특집이라는 계절적 장치 안에 머무르지 않고,
떠나지 못한 감정이 머물고 있는 풍경을 노래한다.
그녀가 만든 여름은 언제나 묘하다.
무섭고 슬프고, 예쁘고 낯설다.
그리고 그 감정은 해마다 다르게 다가온다.
올해의 ‘지박’은 머물러 있다는 것의 의미를 조용히 묻는다.
1. 여름마다 다시 돌아오는 한 편의 이야기
안예은의 납량특집은 매년 여름, 하나의 이야기로 돌아온다.
‘능소화’는 금기된 사랑을,
‘창귀’는 잊혀진 존재의 분노를,
‘쥐’는 인간 내면의 악을,
‘홍련’은 물속에 잠든 슬픔을,
‘가위’는 꿈과 현실 사이의 경계를 노래했다.
그리고 이번엔 ‘지박’,
어디에도 가지 못하고 그 자리에 묶여 있는 마음의 형태.
지박령이라는 소재는 호러 장르에서 자주 등장하는 익숙한 개념이지만,
안예은은 그 외형을 빌려
우리 내면의 오래된 감정을 이야기하고 있다.
공포는 시작점일 뿐이고,
그 너머엔 애틋함과 인정이 있다.
2. 음악이 말해주는 것들
‘지박’의 첫 음은 매우 조심스럽다.
기이한 현악기 음색과 묵직한 베이스가 맞물려
금방이라도 뭔가 튀어나올 것 같은 분위기를 조성하지만,
정작 이 곡은 침착하게 감정을 쌓아간다.
보컬은 늘어지듯 느릿하고,
가사는 간결하지만 함축적인 표현으로
누군가의 오래된 감정과 집착을 시적으로 풀어낸다.
무섭다기보다는 슬프다.
그 감정을 반복하고 되새기며,
어디에도 닿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음악 전체에 흐른다.
후렴의 멜로디는 단순하지만 묘한 중독성을 가지고 있고,
그 반복 속에서 이 노래는 잊히지 않는 무언가를 품고 있다는 걸 암시한다.
3. 영상 속 그녀가 바라보는 곳
뮤직비디오의 배경은 하나의 폐쇄된 공간이다.
낡은 벽지, 퇴색된 소품, 낯선 색감의 조명.
그리고 그 안에서 인물은 움직이기보다 머무른다.
표정은 말이 없지만,
움직임 하나하나에 떠나고 싶은 마음과 떠나지 못하는 현실의 간극이 있다.
그녀는 그 공간의 일부가 되었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게 아니라 버티고 있다.
카메라는 인물을 따라가는 대신
공간의 분위기, 그림자의 흔적,
감정의 잔재를 천천히 쫓아간다.
마치 우리가 오래된 기억을 엿보는 관찰자가 된 듯한 기분이 든다.
가끔 등장하는 문자나 오브제는
지박령이라는 존재가 사람보다 오래된 감정일지도 모른다는 암시처럼 작용한다.
공포는 장치이고,
이 영상은 사실 마음에 대한 은유다.
4. 공포보다 오래 남는 감정
‘지박’을 들으면
사람마다 각자의 ‘묶인 마음’이 떠오를 수도 있다.
헤어진 연인, 지나간 선택, 혹은 자신 안의 후회.
그 마음은 생각보다 오래 남는다.
이 곡은 그러한 감정이
지박령처럼 어느 자리에 머물러 있다는 것을 인정하게 해 준다.
그게 유령 같든, 감정 같든,
우리는 모두 그 존재와 함께 살아간다.
안예은은 그 이야기를
지극히 섬세하게 그리고 동시에 감각적으로 풀어낸다.
그래서 이 노래는 무섭지 않아도 섬뜩하고,
슬프지 않아도 아프다.
5. 안예은이라는 장르
안예은의 음악은 하나의 장르로 명명해도 될 만큼 독보적이다.
그녀는 전통 민속 소재를 현대 감각으로 해석하고,
공포라는 낯익은 틀 안에서
완전히 새로운 정서적 색깔을 만들어낸다.
매년 이어지는 납량특집 싱글은
콘셉트형 프로젝트에 그치지 않고
안예은이 사람의 감정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를 보여주는 기록이다.
‘지박’은 그 흐름의 한가운데 있다.
외롭고, 조용하고, 오랫동안 남아 있다.
6. 마무리하며
우리 모두의 마음에는 떠나지 못한 감정 하나쯤은 있다.
사라지지 않은 이름, 지워지지 않은 기억,
계절이 지나도 그대로 있는 장면.
‘지박’은 그런 마음에 조용히 말을 건넨다.
“그 자리에 그대로 있어도 괜찮아.”
때로는 떠나지 않는 것도,
그 자체로 의미가 된다는 걸 말해준다.
그리고 그 말은 무섭지 않지만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여름이 끝나도, 이 노래는
그 자리에서 우리를 기다릴 것이다.
언제까지나...